막스 피카르트의 언어관은 필자가 주장하는 시간적 뫼비우스의 띠에 걸려 버린 엘리어트의 시빌레의 역설을 잘 드러낸다. 물론 엘리어트 자신이 그런 시간적 도치 구조 안에서 시빌레를 포착하지는 않았다.그러나 그의 다른 작품인 <사중주>를 보면 구체적으로 언어가 스스로 살아 있는 생명체인데 헤겔의 말처럼 그대로 찢어져서 객체가 되는 것처럼 묘사한다. 하이데거의 언어관과 아주 흡사하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서로를 탐독하지 않아도 '동일한 직관'의 자극을 받을 말을 하게 된다. 물론 수십년 정도 연구하여 늘 남의 주장을 동의어나 각종 수사학을 동원하여 적당히 포장하는 정도의 논문이나 저술물만 내놓던 이가 갑자기 '돌직구'에 가까운 둔탁한 철학자가 되어 아주 새로운 이론을 내놓는다면 의심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어느 정도의 진전을 이룬 이들을 더욱 경계해야만 할 것이다.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왜 자꾸 이렇게 많은 글을 자꾸 남기는 것일까? 논문이 되었든 저술물이 되었든 연구한 내용을 발표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왜 지난 1년 반동안 왜 이리 노마드처럼 이리저리 디지털 공간을 방랑하며 미완의 초록들만 남기냐는 것이다.
이상은 결코 이 나라의 자생적 지적 결집체들의 체계적인 프로그램에 의해 탄생한 천재가 아닐 것이다. 그냥 불쑥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다. 이상의 <실락원>은 정말 소름끼친다.
아래에 류재화님께서 깔끔하면서 묘한 울림을 전달하는 서평을 써주셨는데 아주 큰 도움을 받았다. 다만 마지막 문단의 진리와 관련된 어휘인 veritas는 이자나미의 히토미에서 슬금슬금 기어다니던 그 구더기들과 관련 깊을것이다. 플라톤의 기하학자들은 월경을 한다. 다이이나다. 월경을 하면 다 다이아나라는 말이 아니고 자벌레와 월경이라는 보리(voirie)의 분출이 동음이의어라는 뜻이다. 왜 독일의 드래곤은 따뜻해야 하나? 스페인어 사전도 '벌레 = 따뜻함'으로 이어진다. 일본의 벌레는 된장국이다.
이상의 <실락원>은 정말 소름 끼친다. 조지 오웰의 <1984>와 동일하게 배앓이를 한다. 조지 오웰의 표절일까?
그리고 내가 쓰는 이 무수한 글들이 지닌 아주 뜬금없는 글들 속에서 발견되는 주장들이 과연 다른 학자들의 논문에서 발견된 적이 있을까?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논문 따위를 거의 읽지 않아왔다. 인간적으로 다시 부탁한다.
"우리는 원래 모르던 내용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웅베르토 나베)
여성 루프는 한 마리일까, 아니면 여러 마리일까? 아마 '뱅마리'(bain-marie)일 것이다. 이중 나베 구조다. 테트베쉬다. 짐승의 더러운 발냄새가 훅, 풍긴다. 다시 한 번 믿는다.
우선 피카르트의 생각을 잘 드러내 주는 본문 인용을 먼저 보고 류재화 님의 맛깔진 해설을 보도록 하겠다. <인간과 말>에 등장하는 막스 피가르트의 언어관이다. 해당 페이지는 한국어판(봄날의책.2013) 기준이다.
"언어는 단지 필요와 목적에 맞게 조합해놓은 사물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살아온 선조가 보았던 모든 것, 즉 존재했던 모든 지나간 사물들 전체를 음성기호로 표기한, 세계에 대한 체계적이며 총체적 묘사" (F.마우트너)인 것이다. 만약 언어가 오직 필요에 의해서만 활용된다면, 언어는 닳아버리고 수축될 것이다. 언어는 침몰하게 될 것이고, 모든 침몰하는 것들을 자신 안에 담아버릴 것이다. 선험성으로 인해 언어는 단순한 용도, 단순한 전달수단 이상의 위치에 있다. 예를 들어, 단순한 전달수단에서 출발한 침묵은 뭔가가 결여된 것이며 비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선험성에서 출발한 침묵은 인간의 최초를 향해, 혹은 인간의 종말을 향해, 어떤 기대를 향해 뻗어나가게 된다." (p.20)
"인공언어는 모든 공간을, 모든 시간을, 마치 압착기처럼 짜내서 폐기해버린다. 그것은 오직 순간만을 위한 언어다. 마치 순간만을 위해 일회적으로 임대한 것과 같다. 사람이 인공언어를 말한다. 하지만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기호를 뱉었을 뿐이다. 그의 세계에는 언어뿐 아니라 사물들까지도 축약되어 존재한다." (p.28)
"선험성을 갖춘 언어에는 치유력이 있다. 그런 언어는 인간을 치유할 때, 인간이 스스로를 치유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언어 자체가 먼저 치유를 필요로 한다.
불멸은 유한하며 유한한 것은 불멸한다.
살아 있는 사람은 타인의 죽음을 살며,
죽는 사람은 타인의 삶을 죽는다.
(헤라클레이토스, <<단장>>,62)" (p.30)
"인류의 원죄 이후로 악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원죄 이후로 행해진 모든 악의 형상이 개별적인 악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의 개인적 악은 원죄로 인해 이후 인간에게 침투한 악과 사악한 경쟁을 벌인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악한 행위가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원죄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자신의 악을 창조해 내는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 어느 한 인간이 악하다면,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 있는 악의 일부분, 앞서 주어진 악이자 원죄의 일정 부분에 관여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이 악하다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그에게 어떤 악도 앞서 주어지지 않았고, 대신 그 스스로가 자신의 인성과 개성을 통해 악이란 개념을 최초로 도입이라도 한 것처럼 이해된다." (p.36)
"소리를 정신에게 복종시키기, 아이는 아직 그것을 할 수 없고, 노인은 더 이상 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말 속에서 오직 소리에 속하는 것이 많이 들리게 된다. 정신과 소리는 작별을 시작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모든 것이 작별을 고한다. 소리와 정신의 작별은 궁극적 작별에 대한 선행 작별이다. 이윽고 정신이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날, 완전히 꺼져버리는 날, 기억상실형 실어증 증세에서처럼, 그때 이름은 오직 음향에 불과한 것이 된다." (p.59)
"어린 아이의 언어는 전체성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기 이전의 언어다. 전체성 스스로가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아이의 말에는 하루의 그림이 침묵하고 있다. 그림은 침묵하면서 아이의 안에 있는 침묵하는 언어를 향해 이야기한다. 어른의 말에도 하루의 그림이 있다." (p.118)
"오늘날의 말은 이제 내면 언어의 전체성과, 그리고 침묵과 거의 아무런 연관이 없는 상태다. 말은 자신의 전체성을 내면의 심연에 두고 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말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알 뿐이다. 말은 고립되었다. 언어의 전체성은 더 이상 말에 어떤 효력도 발휘하지 않는다." (p.121)
" 우리의 크라튈로스는 주장한다. 모든 사물마다 그 사물의 속성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하나의 올바른 명칭이 존재한다고. 그런데도 몇몇 사람들끼리 합의를 통해 자기들이 가진 소리의 저장고에서 임의로 말조각을 꺼내 그 사물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제멋대로 정해버린 것이라고. 그런 식으로 결정된 것은 그 사물의 진짜 이름이 아니라고. 이름에는 자연에서 유래하는 공정함이 있고, 그 공정함은 어느 누구에게나 동일하다고."
(플라톤, <크라튈로스>)
'커다란 배 한 척이, 막 여기 운하에 도착하려 한다' (괴테)
"수직성 자체는 오늘날까지도 인간 형상의 최우선 요소다. 그 수직성을 이루어낸 창조적인 움직임의 뒤를 이어서, 뼈와 근육, 피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 같다. 최초로 말이 침묵을 깨고 터져나올 때의 그 결정성과 인간 형상을 이루는 수직체의 결정성은 하나다." (p.190)
[프레시안 books] 막스 피카르트의 <인간과 말>
막스 피카르트는 돌연 침묵하게 만든다. 무작정 돌진하던 내 혀가 검은 내 아가리로 들어간다. 말하고 싶은 안달이, 다 설명하고 싶은 강박이,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형상 기억 장치마냥 수그러든다.
막스 피카르트라는 이름을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간과 말>(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펴냄)이라는 너무나 자명한, 진부하기까지 한 제목 아래 무심히 등록되는 저자가 아니다. 그는 관조자, 어둠 속을 주시하는 한 마리 부엉이다. 피카르트의 글에서는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모태 속에서 들었을 법한 어머니의 고른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린다. '-다'로 연신 조용히 착륙하는 기이한 서술형 종결어미. 우리말의 '-다'가 이토록 내 두개골 아래서 잔잔히 울려 퍼진 적이 없다. 역자 배수아의 말처럼 번역이 "이종간의 사랑"이라면, 독일어와 우리말은 부드러운 안개처럼 잘 뒤섞였다.
사유 충만하면서도 행간마다 내적 공명 가득한 이 장편의 산문시는 다시 내 말로 잘 옮겨지지 않는다. 독서가 텅 빈 허공에 자기만의 정신의 계단을 만들어 오르고 내리며 아찔한 황홀경을 느끼는 일이라면, 그의 글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느리고 차분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분명 무언가를 불쑥, 통째로 보게 만든다. 온전히 옆도, 온전히 뒤도 볼 수 없었던 내 시각의 맹점(盲點)이 일거에 확대되는 느낌이 든다.
"죽음은 인간에게 앞서 주어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과 함께 그에게 앞서 주어진 죽음을 죽는 것이다. 죽음이 미리 주어지지 않았다면, 죽음은 인간을 기습하는, 훨씬 더 격렬한 사건일 것이다."(36쪽)
사건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앞서 주어진 것이라는 피카르트의 일관된 상념은 종교적 운명론도 아니고, 형이상학적 관념론도 아니다. 우리의 생물적 감각은 이미 그것을 안다. 피카르트는 '아버지'란 "선행하는 창조력"이며 "선행하는 경고"라고 말한다. 어머니란 "선행하는 보호"다. "인간의 기본구조에 속하는 모든 요소는 앞서 주어진 것이다."(16쪽) 막스 피카르트가 이 책에서 줄곧 환기하는 '선험성'은 '내재적 초월'이 아니라 '내재적 하강'으로 번역될 필요가 있다.
'이곳', '지금', 이 대기권 생물계의 우리는 애초부터 원초가 아니라 파생이었다. 탄생이 아니라 이동이다. 우리는 양각이며, 돌출이다. 모든 '현존'하는 것의 시작점을 '나', '지금', '여기'가 아닌, 그보다 앞선 지점, 혹은 더 아득히 앞선 지점으로 설정함으로써 피카르트는 시간과 공간의 영역을 왼쪽으로, 그러니까 이미 지나온 것 쪽으로 조금 앞당긴다. 그러고 나면, 우리가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얼굴, 우리의 자아, 우리의 실존, 우리의 감정, 우리의 의식 따위는 상대적으로 '튀어나온 것', 쓸데없이 '과잉'된 것이다. "얼굴은 우리의 종착역"이라는 피카르트의 말은 '얼굴'이 타자를 위한 현존으로서 내 실존의 당당한 시작이 아니라, 이미 끝나버린 실존, 이미 끝나버린 사랑 행위라는 말로 읽힌다. 그의 세계에서 보자면, 사르트르식 '실존주의'는 일종의 '오버'다. 우리는 좀 더 안으로, 뒤로 물러나야 한다. 내재적 하강으로, 내 내면의 우물을 깊이 파야 한다. 샘물은 저 깊은 심연에서 발생하지, 흘러넘친 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이미 주어진 것"이 실은 우리가 영영 잃어버린 것이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발생한 지점에서 우리는 너무 멀리 와 있다. 상류에서 한없이 멀어진 하류의 쓰레기 잔해물처럼 우리는 둥둥 떠다닌다. 숱한 대상을 만나도, 만남은 있으나 떨림이 없다. 토막 난 부도체마냥 자성(磁性) 잃은 나는, 아니 '나'라는 개체는 습성화된 몸짓으로 다른 개체와 붙는 척 할 뿐이다.
모든 것이 과잉인 시대에 사는 우리는 웬만한 것에는 전율하지 않는다. 언어의 과잉, 소리의 과잉, 이미지의 과잉, 빛의 과잉. 손바닥 안에 든, 21세기의 작은 괴물을 하루 종일 바라보며, 그것이 우리를 집어삼키는 줄은 새까맣게 모른 채, 의미조차 생성되지 않는 희한한 기표들을, 날파리 같은 하루살이 검색어들을, 소리만 무성한 잡음어들을 매일같이 집어삼키며 우리는 나날이 '없어지고' 있다. 끊임없이 외연만 연장하는 스토리에 포식되어 우리는 정작 내 내면의 스토리는 잃어버렸다. 과잉의 과잉 시대가 공포스러운 것은 나가도 너무 나간 나머지, 안으로 들어오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최초의 '과잉'은 가장 원초적이며, 가장 본래적이며, 가장 야생적이고 야한, 근원적인 생명점이었다. 창조적인 것은 포만의 정점에서 터진다. 말(末)은 나무 끝에서 막 솟아나온 또 하나의 작은 가지다. 끝이 곧 시작임을 알리는 이 짜릿한 연속성을 찰나에, 단 한 번에 알리는 상형 문자, 그 문자의 힘. 이것은 다른 언어에도 있다. 프랑스어로 '끝'(bout)은 눈, 싹, 꽃망울, 여드름, 단추를 뜻하는 'bouton'으로 이어진다. 과잉은 더는 못 참고 터지는 것, 최초의 순수 배설물이다. 우리는 이 최초의 과잉 지점에서 놀았어야 했다. 그곳에서만 황홀하게 자지러지기 때문이다.
땅속을 뚫고 나온 것이 싹만은 아니다. 인간의 혀, '랑그' (langue), 언어 또한 검은 입 속에서 삐져나온 잎이다. 인간은 말로써 존재하는 것 같지만, 대개는 말로써 자기 존재를 잃는다. 언어는 필수품이자 사치품, 잉여다. 파스칼 키냐르 식으로 말하면, "언어는 공기 중의 혐오스러운 파장"이며, "수상쩍은, 쓸데없는" "삶의 열정"이다. 말들이 얼굴을 만들지는 않으며, 말들 없이도 우리는 산다. 문제는 진짜 언어는 발설된 언어 이전에, 언어의 근원에 있는데, 이 근원은 얼굴이, 형체가 없다는 것이다. 실체는 있으나 형체는 없는 기이하고 신선한, 신비한 영액 같은 물속에서 언어가 탄생한다.
막스 피카르트의 <인간과 말>이 특히 빛을 발하며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은, 그가 '말'을 수가지 자연물(바람, 공기, 돌, 용암, 새, 벌레)로 활물화 하거나, 조형화된 온갖 형상으로 환유하면서다. 그의 메타포들은 범람한다. 자연계와 상상계를, 개념계를 전광석화처럼 이리저리 이동한다. 피카르트는 텅 빈 허공에, 어둡고 푸른 창공에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수많은 형상들을 조각한다. 말이 보인다. 침묵이 보인다.
"순수하게 언어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은 침묵으로부터 튀어나와서, 불현듯 어느 한순간 거기 현존한다. 발생과 현존은 하나다."(49쪽)
피카르트는 언어 역시나 "이미 주어진 것"으로 본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선험적 언어는 "말과 사물이 낙원의 합일" 속에 머물렀던 때의 언어, 인간의 언어가 아닌 신의 언어, 인간이 잃어버린 언어다. 분리 이전의 세상, 인식의 나무인 선악과 이전의 세상, 실낙원 이전의 세상에서는 언어가 침묵을 내장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가 장막을 찢고 무대 위로 튀어나오니, 저 아래 아기 천사들이 심란한 표정을 짓는다. 라파엘로가 넌지시 암시한 것이 그것이다. 탄생이 곧 죽음이라는. 피카르트는 그리스도가 장막을 뚫고 나온 것처럼, 인간의 언어도 미세하고 신선한 얇은 장막을 뚫고 나왔다고 본다. 꽃봉오리는 터졌으므로 시들 일만 남았다.
"언어는 말을 하면 할수록 스스로에게서 멀어지며"(86쪽) "오직 무작정 앞으로 나가는 것 이외의 다른 방향을 알지 못하는 언어는 폭력적이다."(30쪽). 피카르트는 침묵을 언어의 반대어가 아닌―이처럼 일차원적인, 저차원적인 상상력이 있을까?―, 언어의 동의어, 아니 언어라는 부분 집합을 포함하는 전체 집합으로 설정한다. 달리 말해, 침묵을 내포한 언어만이 진정한 언어다. 침묵을 내포하지 않은 언어는 잡음어에 불과하다. "공기 중의 파장"이라는 언어가 우리의 가슴 조각 하나 떨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들 언어가 심연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며, 내적인 연속성 없이 외적인 연속성만 계속해서 늘려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피카르트는 이미 <침묵의 세계>(최승자 옮김, 까치글방 펴냄)에서 언어와 침묵의 관계를 이렇게 뚜렷하게 형상화 한 바 있다.
"죽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태고의 짐승처럼 침묵은 거기 누워 있다. 그 침묵의 넓은 등이 아직 보이기는 하지만, 그 태고의 짐승의 몸 전체가 오늘날의 전반적인 소음의 덤불 속에서 점점 더 깊이 가라앉고 있다. 그 태고의 짐승은 점차적으로 자신의 침묵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오늘날의 모든 소음은 다만 그 태고의 짐승, 즉 침묵의 드넓은 등에 붙은 벌레들의 울음소리에 불과한 것 같다."
계시록처럼 읽히는 이 아찔한 문장은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단번에 보여준다. 우리 안에 길게 드러누워 소리 없이 울부짖고 있는 태고의 짐승. 그것이 없거나, 있어도 어찌된 일인지 위로 끌어올리지 못한다. 모리스 블랑쇼가 라스코 동굴벽화에서 영감 받아 환기하고 있는 '거대한 침묵'도 이것이다. 또 파스칼 키냐르는 단말마의 메두사의 입 속으로, 그 자궁 같은 동굴 속으로 후진하는 언어를 상상한다. 키냐르는 벌어진 입 사이로 새어나온 말보다는 "혀끝에서 맴도는 말", 혹은 동굴의 내벽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겨우 역류하는 언어들만을 사랑한다. 그는 언어는 "반몽 상태에 억류되어 있는" "낮은 목소리의 중얼거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아노'(약하게)라는 말이 '피아노포르테'라는 말을 대체한 이유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왜 사랑을 잃는지 키냐르는 늘 상기한다.
우리가 "이미 주어진 것"으로, '과거'로, '태고'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이 발원점과 통하는 방법이 그나마 있다. 발원점에서 너무 멀리 온 우리 부도체가 애써 전도체가 되는 것이다. 자성이 흐르면 발원점과 종착점이라는 양극은 어떻게든 통한다. 부도체에 자성이 흐르게 하려면 뒤를, 지나온 것을 더욱 파야 하는데, 우리는 더욱 앞으로만 질주한다. 막스 피카르트는 우리는 이제 '과잉'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과잉의 행위'에 놀란다며 절망한다.
"파괴된 말, 말기호 그리고 무제한의 기술은 서로 상응하는 성질이 있다. 단선적인 말기호는 곧장 단선적인 행위와 단선적인 기술로 이어진다."(176쪽)
"과잉의 충만이 원인이 아니라, 무제한의 실험으로 놀라움을 양산해보려고 하는 빈곤함이 원인이다."(177쪽)
우리의 잡음어는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겠다는, 잡음어의 마지막까지 가보겠다는, 그래서 기필코 진짜 말이 다시 돌아오도록 만들겠다는 인간의 절망적 시도"(146쪽)다. 우리는 언어에 지치면 입을 다물 것이다. 그러나 이 '입 다뭄'은 생태적 침묵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발생시키지 못하는 침묵이다. 피카르트는 이제 우리 언어는 '구조'를 갖지 못한 채, '행위'만을 계속해서 유발한다고 폭로한다. 과잉 행위의 반복이란, 정신은 결여된 채, 광인의 행보처럼, 자기 안에 온전히 파고들기보다 자기 밖으로 계속해서, 계속해서 낳아가는 형국이다. 우리는 미친 듯 최대치를 열망하며 계속해서 앞으로만 나아간다. 이러한 진보는 충만이 아니라, 결핍 자체를 초래한다.
'선험성'이 '먼저 있는 것', 그러나 상실한 것, 선행하였으나 이미 멀어진 것으로만 환기된다면, 우리는 그의 책 말미에 이르러 절망감에 빠졌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것을 기적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온전히 깃든 것으로서의 '전체성'이다. '선험성' 개념과 함께 피카르트의 두 번째 '복음어'가 그것이다. '선험성'이 직선적 상상력으로 파악된다면, '전체성'은 심연 바닥까지 둥글게 파서 다시 휘감으며 올리는 것으로, 천체의 궁륭처럼 연상된다. 과잉되고, 돌출되고, 양각되거나, 도망치고, 물러나고, 음각되고, 이 모든 상대적 뒤죽박죽들을, 언어의 다양성을, 진리의 다양성을 자비로운 풍족함으로 껴안는 전체성. 이것이 내적 발열성, "진실한 엔트로피"다.
진리는 향하지 않고, 깃든다. 우리가 아는 서양적 진리, '베리타스'(veritas)는 하이데거가 복원한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즉 "은폐되지 않은 것" "폭로되고 계시된 것"으로 복기되어 있다. 그런데 막스 피카르트는 '진실된'(verus)이란 어휘는 어원상 고대 북유럽어인 '바라르'(varar), 혹은 고대 고지 독일어인 '바라'(vara)에서 왔음을 명시한다. 이것은 밖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안에 온전히 깃들어 있는 '충실', '신의'다. 돌출되고 과잉된 언어 속에서도, 우리가 언어 때문에 전율하기 위해서는, 언어 안으로 온전히 깃들도록 극도로 애쓸 수밖에 없다. 곤궁한 나도, 허무한 나도 가만히 내 안에 침잠할 때 그나마 힘이 다시 솟아나는 것처럼.
류재화 번역가 (mal@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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