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0일 토요일

저자의 죽음에 관한 고찰

<저자의 죽음에 관한 고찰> 저자는 누구인가? 우선 롤랑 바르트의 의견을 가장 중립적인 입장을 택할 수밖에 없는 '위키피디아'를 통해 들어보자. 이후 필자의 견해를 댓글을 통해 밝히도록 하겠다. - 롤랑 바르트 (1915~1980) -   초기에는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참여적 실존주의자로 후기에는 기호 언어학자에서 원전 비평가로 그 얼굴을 바꾼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의심할 바 없이 1960년대와 1970년대 프랑스의 이론가 중 가장 기발하고 재간 있고 대담한 이론가였다. 그의 문학 비평이 언어 사회학이나 구조주의 기호학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프랑스적 수재의 전형인 롤랑 바르트는 그 외모에서 보듯 아주 지적이고 때론 아주 차갑게까지 느껴진다. 그는 조르주 바타이유처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서구 문화의 광기와 열정으로 넘치는 첨단 문학가임에는 틀림없다. 롤랑 바르트의 문학적 이상은 ‘글쓰기의 신화에서 완전히 벗어난 에로티시즘의 회복’에 있다. 이는 말의 원형을 회복함으로써 성의 원전을 그대로 복구하려는 시도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그의 연구는 문학의 장르보다는 원전 연구에 집중된다. 그러나 그는 불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연관의 관계를 캐내기 위해서 그 원전들을 초월해 나간다. 그의 의도는 소위 모든 허위 관념과 지배 이념을 폭로하는 데 있다.   그는 원문들 속에 숨어 있는 또 그 배후에 깔려 있는 것들을 추정하며, 행간에 담긴 단어들과 의미들을 재해석하며 글의 내용을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연상하게 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는 『글쓰기 영도(零度) Le degré zéro de l'écriture』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원전의 배후 의도를 밝히고 모든 언어의 원형적 무의식인 세계를 벌거 벗기려 했다.   글쓰기 0도란 글쓰기에 있어 의미의 폐쇄, 후퇴 그리고 보류를 뜻한다. 롤랑 바르트는 글의 의미 그 자체보다 그 의미를 창출하는 과정에 더 관심이 있었다.  글을 쓴다는 건 진정한 글쓰기의 거부하는 것이고 또한 그 문턱을 넘는 것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글쓰기를 하지 않는 글쓰기(écriture sans écriture)' 라는 것이다.   단순한 관능적 즐거움이 아닌 정신적 희열을 추구하는 이 '본원적 글쓰기(archiécriture)' 는 무엇보다도 '이미 쓰여진 문화 (always ahead written)' 체계 내의 작업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문학이 사라지고 더 이상 거짓말투성이의 그 비밀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제로점'에서 그는 다시 문학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 관점은 다시 문학을 본래의 것으로 돌려놓고, 중립적일 수 없는 글쓰기를 '중립화 (neutralité)'하는 것이다.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말, 결코 그치거나 들려 주지 않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이며 글쓰기의 원점과 태초 원형으로 돌아감을 뜻한다. 롤랑 바르트는 초기에 사르트르 등 좌파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참여 문학(littérature engagée)'을 통해 인간애를 발휘하여 프티-부르주아적 출신을 초월하려고 그들과 가까이 지내기도 했지만, 여타의 지식인 마찬가지로 그는 결국 소쉬르의 기호학에 가담하게 되고,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 즉 어떻게 신화들이 인간 안에서 사고하는가 하는 점과 그 공통적 기원을 언어학적 방법론으로 사회 현상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이 구조주의를 넘어선다. 그는 기존의 문학과 비평을 전면 거부하고, 작가의 창조력까지도 넘어서는 비평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비평이 작가의 예속 상태에서 벗어난 진정한 문학의 독립 장르임을 선포했다.   조장하는 대중 매체의 의해서 은폐된 메시지를 가차없이 폭로하고 우파나 좌파 가릴 것 없이 그 신화의 위장성과 허위성을 파헤친다. 롤랑 바르트는 1850년경 플로베르나 발자크를 고비로 부르주아적 질서가 해체되는 것으로 보는데 이것은 단지 그의 비평의 작은 시작일 뿐이다.   프랑스의 고전 문학은 부르주아적 질서의 불가피성을 꾸밈없이 반영 그 가치를 약호화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라는 말에서부터 우리는 그의 문학 비평이 얼마나 엄청난 선전 포고이며 그의 문학의 길이 평탄하지 않음을 이미 예고하고 있다. 롤랑 바르트는 우선 글쓰기에 있어 언어소를 분석하면서 다양한 서술 방식의 출현을 파편화하고 작가의 부르주아적 기원을 캐내어 제시한다.   그는 작가의 언어를 통해 소위 문학적 창조를 검증한다는 것과 언어와 특수한 원전들에서의 표현이 이런 뿌리에 근거한 것이라는 역사적 차원 사이를 구별시켜 준다는 것이 유용하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는 문학 전통의 모든 영역을 공격자였다. 문화 전쟁의 홍수 시대에 그는 가장 적이 많은 지휘자 역할을 했고 그의 비평은 무자비한 융단 폭격이다.   그의 이 노력의 방법론은 '통렬한 아이러니(devastating irony)'인데 이것은 결국 이중 부정 내지 양자 부정일 수밖에 없다.  그는 영화나 관광을 포함한 대중 소비 문화에까지도 언급을 하면서 상업성과 자본 증식의 대가는 진정한 에로티시즘의 상실을 초래했다고 보며 이제는 단지 하나의 스포츠와 오락만 남게 되었다고 꼬집는다. 그는 라신(Racine) 연구에서 라신의 파토스 속에 숨긴 정치적 의도를 맹공격한다. 그의 연극 속에 주인공의 열정은 사랑이 아니라, 정욕적 상황에 있어서의 힘이라는 점을 지적하자, 라신의 비평의 대가 레이몽 피카르 (Raymond Picard)는 그와 격렬한 논쟁이 벌리게 된다.   그뿐 아니라 롤랑 바르트는 20세기에 최대로 존경받는 랑송(Lansonisme)까지도 그의 비평의 대상에 포함시킨다. 그는 그들의 비평을 정치적이고 지적 보수주의이며 실증적 부르주아 이념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롤랑 바르트의 신비평을 '악마의 손잡은 사악한 원흉'이라고 되받아 치고 있다. 바르트는 1960년 『작가의 죽음 The death of the author』을 선언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다. 이 글에서 작가는 텍스트의 기원이고 의미의 근원이며 해석을 위한 유일한 권위를 가진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거부했다.   그는 작가를 평가 절하하여 다음과 같이 꼬집어 말하고 있다. “작가란 그 시대의 재능 있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작가가 범하는 가장 큰 과오는 언어가 독자에게 정확하고 확실하게 진리 또는 사실로 알게 하는 가장 자연적이고 솔직한 매체라는 주장은 거짓말이라고 반박한다. 그는 독자들이 저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신들의 의미를 - 창출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독자들이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텍스트들은 항상 유동적이고 불안정하고 의심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이 점은 그러한 해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과학적 내지 구조주의적 저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신비평에서는 텍스트의 통일성이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작품 그 자체의 구조에 달려 있다고 믿었고, 인본주의적 내지는 인간주의적 개념을 추방하는데 급진적이었다. 동시에 그는 독자의 고유성 확보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작가가 가진 모든 형이상학적 상태를 벗겨 버리고 사거리 골목으로 그 지위를 낮춘 다음 그곳에 인용과 반복, 모방과 지시 교차와 재교차의 무한한 보고를 올려놓는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어느 방향으로든지 텍스트에 가담하는 데 자유롭게 해 주었다. 거기에 어떤 공식은 없다. 그의 이런 충격적 선언은 그를 사람들이 논쟁을 좋아하는 인물, 독단론자, 이념적 인상주의자로 불리어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지 모른다. 1968년 『기호학 요강(Éléments de la sémiologie)』에서 그는 언어와 그의 메시지를 탈신화화하는 데 주력하여 근대 모든 작가를 그의 비평 언어에 끼어 넣었다. 그는 문헌 연구에서 인류 문화의 모든 기호 체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언어를 단지 기호일 뿐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실재를 창조한다기보다는 언어가 오히려 우리를 위해 실재를 구성한다는 구조주의 언어 철학과 맥을 같이한다. 그는 더 나아가 기호학적 분석은 다시 언어로 무너져 버린다고 경고와 함께 현실로 완전히 침투하는 예술 즉 예술과 현실의 경계는 그 둘이 보편적인 모조품으로 전락하면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라고 봤다. 바르트는 문학뿐만 아니라 패션, 레슬링, 스트립쇼, 스테이크와 감자 튀김, 사진 그리고 심지어는 일본 회사까지 포함하여 문화적인 모든 것의 부호 해독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기호학 옹호자였다. 다시 말해 이미지, 몸짓, 음악적 음향으로 된 모든 것을 기호라고 주장은 전통적 작가로부터 엄청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기호학자에게 언어로부터의 출구는 없다, 그 분석을 수행하는 그의 소위 '메타 언어(méta-langage)' 개념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 개념은 1차 언어를 넘어서는 2차 언어를 뜻하며 언표 되지 않은 언어의 무의식적 구성 요소를 분석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언어의 메시지는 단지 하나의 유통 과정이거나, 자율 신경적 통로 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발생 시기에 있어서 단어의 '기호적 지향(parole parlante)'과 '언표된 언어(parole parlée)' 를 확연히 대립시켜 구분하고 있다. 메타 언어는 일상 언어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구조주의와 같은 기술적인 언어이다. 언어를 통해서 의미를 창조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말하는 언어라고 한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1920년대에 메타 언어로서의 논리적 한계에 도전 받기도 했다. 특권이 부여된 또는 메타 언어적인 입장은 언어 자체에 의해 창조된 신기루이다. 구조주의와 기호학 그리고 의미의 수수께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한 다른 형태의 메타 언어들은 다시 언어로 되돌아올 뿐 이 역시 출구는 없다. 이 '초언어학(trans-linguistique)'은 사회 속에 기호들의 삶을 연구하는 학문 소시민적인 신화의 폭로와 함께 과학적으로 발전된 방법 접근이다. 그는 점차 러시아 형식주의와도 담을 쌓으면서 또한 이런 구조주의와 조금씩 멀어 지면서, 더욱 더 원전 분석에 정열을 쏟는다. 1973년경에 나온 『원문의 즐거움(Le plaisir du texte)』에서 그는 이런 개념들을 도입한다.   '파편, 사실, 경구, 건드리기 및 치기, 찌르기, 팔꿈치로 치기, 거품 내기, 반응 떠보기, 불가피한 무작위의 계기와 쾌락을 잡아내기, 행복을 얻기'를 여러 항목으로 나누어 열망하는 임의적인 계획에서의 불가피하게 무작위성에 심혈을 기울인다. 원전 연구에 더욱 기울어진 것은 1968년 학생 시위로 좌파 지식인들이 탈정치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정치적 행동의 무용성이 대두하면서부터이다.   그는 발자크의 단편 『사라신(Sarrasine)』 를 561개의 '독서 단위(lexia)'로 나누어 분석하기도 했다 그의 5가지 약호 즉 '해석학적 분류, 의미론적 분류, 상징적(다의적) 분류, 서술적(행동적) 분류, 문화적 분류' 등을 통해 원문들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우리의 언어가 우리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할 때, 우리는 삶의 상실과 고통 빠지게 된다는 말을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말의 논리와 성의 게임은 신화나 설화의 본질을 왜곡함을 지적하면서 특히 현대 사회에서 시라는 장르는 그 기생성으로 혹되게 비판받아야 마땅하다고 보았다. 그의 문학 시기를 흔히 초기 '감탄(émerveillement) 시기’, 중기 '과학 (science)시기’, 말기 ‘텍스트(texte) 시기’로 나누기도 하는데 말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그는 원전 연구에 깊이 빠진다. 원전에서 얻어지는 '텍스트의 지적 쾌락(plaisir)’은 '단순한 즐거움(jouissance)’과 구별되는 것이다. 사드, 푸르니에, 로욜라 문학에 대한 문학 비평은 신성 모독과 같은 효과를 낸다. “책은 의미를 창출하고 의미는 삶을 창출한다” 라는 말은 독자에게 자기 방식으로 원전을 해석하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원죄의 즐거움과 원문의 즐거움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나체의 미가 의복을 만나는 순간 성적 쾌감이 모아지듯이 텍스트의 효과는 주석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언어와 관련되어 비정통적이거나 부당한 어떤 것을 낳게 된다고 보았다. 그의 말기의 저서 『에스 제드(S/Z)』에서 레비-스트로스 부족 전체 문화 체계 속 파악처럼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무시한 채 자유롭게 텍스트 의미 형성하고 참여하며 텍스트의 절대적 근원과 그 의미의 존재를 부인한다. 독자가 참여하는 텍스트를 2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번째 유형은 독자의 고유성을 인정하며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로 보는 것과 두번째 유형은 작가성을 지닌 생산성으로 보는 것이다. 그는 독자를 고전적 의미의 단순한 소비자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다원적 의미의 적극적인 생산자로도 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전위의 후위'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S/Z]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의 구조로 파악하는 구조주의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언어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단어 창출하는 데 거침이 없다. 지적 사회의 문화 전쟁 속에 대표 주자로 그는 더욱 무례하고 신랄하며 제멋 대로다. 원전의 개념은 문학의 개념으로 배로 확대하면서 그는 더욱 파란과 논란의 비평가가 된다. 그는 또다시 무정부주의자의 신, 보수주의자에겐 악마, 문화 애호가에겐 우상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그는 모든 문학의 범주화를 거부하고 그의 시대 보다 앞서 치고 가면서 기상천외한 재치와 해박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 현대 최고의 지성이다. 프랑스의 예술 사회학자 장 뒤비뇨(Jean Duvignaud)는 그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상징과 기호를 통해 자유의 감동과 … 미래의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면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폭넓은 경험을 얻으려는 실존력을 다루었다.” 신화에 의한 허위 환상에 의해 정지된 즐거움을 원점을 만나게 해 모든 문학의 본래적 의도와 쾌락을 되찾게 해주려는 그의 의도는 참으로 많은 파란과 혹평한 세평을 감수해야 했다. 그만큼 그는 현대 사회와 문학 비평에 많은 물음표를 던지 사람이다. 논쟁의 구심점임을 부정할 수 없다. 어쨌든 롤랑 바르트는 글쓰기의 신화에서 벗어난 글쓰기의 0점에서 글쓰기의 근본적 반성과 함께 진정한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는 문학적 쾌락주의자였다. 화법의 한 형식이기도 한 모든 신화의 허구성과 모순성을 깨트리며 문학의 과학화와 정보화를 꾀한 최초의 인물이었고 21세기의 문학과 문화의 새 출발과 가능성을 열어 준 사람 중 하나다. 그는 금세기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진정한 비평 문학의 한 장르를 개척한 문학 논쟁의 최전선 전사요 특이한 기호 문학가였다. 그의 글은 문학 장르를 해체하고 새롭게 태어난 글쓰기의 실천가였다. 즉 그의 글은 그 자체가 시이기도 하고 소설이기도 하고 연극이기도 하고 수필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하고 비평이기도 했다.   위키페디아 내용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1915~1980) 프랑스의 탈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 [그의 생애]  소르본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한 다음에, 파리에서 고등학교 선생을 했다. 이후 부카레스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대학강사를 하며 보냈고, 1952년 파리의 국립과학센터( 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의 연구원이 되었다. 1953년 근대문학의 형성을 다룬 《글쓰기의 영도 Le Degré zéro de l'écriture》가 출판됐고, 1957년 일상생활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기고문을 모아 엮은《신화론 Mythologies》이 뒤따랐다. 1962년 프랑스고등연구실천원(프랑스어: 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의 연구책임자로 임명됐다.  1960년대 기호학과 구조주의에 전념했지만(《기호학원론 Éléments de sémiology》(1964), 《유행의 체계 Systéme de la mode》(1967)), 곧이어 구조주의를 폐기했다.(《S/Z》(1970), 《텍스트의 쾌락 Le Plasir du texte》(1973)).  다재다능하여 연주도 하고 그림도 그렸던 바르트는《오브비와 옵투스 L'Obvie et l'obtus》(1982)에서 슈만과 톰블리(C. Y.  Twombly)를,  <밝은 방: 사진에 대한 노트 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1982) 에서 사진을 다루었다. 1976년 콜레주 드 프랑스( Collége de France)의 문학기호학 교수로 초빙됐다.  바르트의 다방면의 작품들은 고유한 발전과 현실적 위치를 끊임없이 성찰한 결과들이다 (자서전인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par Roland Barthes》(1975)와 대담집 《목소리의 결정 Le Grain le la voix. Entretiens 1962~1980》(1981) 참고).특히 그가 쓴 '작가의 죽음'은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80년 교통사고로 죽었다. Entretien avec Roland Barthes   [그의 저서] 《글쓰기의 영도 Le Degré zéro de l'écriture》 Paris 1953 《신화론 Mythologies》 Paris 1957 《기호학원론 Éléments de sémiology》 Communications 4 1964 《유행의 체계 Systéme de la mode》 Paris 1967 《기호의 제국 L'Empire des signes》 Genf 1970 《텍스트의 쾌락 Le Plasir du texte》 Paris 1973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R. B. par. R. B. Paris》 Paris 1975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Paris 1977 《강의 Leçon》 Paris 1978 《밝은 방: 사진에 대한 노트 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 Paris 1980 《목소리의 결정 Le Grain le la voix. Entretiens 1962~1980》 Paris 1981 《비평에세이 Essais critiques III.  L'Obvie et l'obtus》 Paris 1982 《비평에세이 Essais critiques IV.  Le Bruissement de la langue》 Paris 1984 《기호학의 모험 L'Adventure sémilogique》 Paris 1985 《작은 사건들 Incidents》 Paris 1987 《전집 Œuvres complétes》 Paris 1993~1995 * 위키피디아 본문 이전 저자의 죽음: http://blog.hani.co.kr/seulsong/27656







2013년 8월 9일 금요일

헤겔의 찢어진 언어 아이, 그리고 막스 피카르트

막스 피카르트의 언어관은 필자가 주장하는 시간적 뫼비우스의 띠에 걸려 버린 엘리어트의 시빌레의 역설을 잘 드러낸다. 물론 엘리어트 자신이 그런 시간적 도치 구조 안에서 시빌레를 포착하지는 않았다.그러나 그의 다른 작품인 <사중주>를 보면 구체적으로 언어가 스스로 살아 있는 생명체인데 헤겔의 말처럼 그대로 찢어져서 객체가 되는 것처럼 묘사한다. 하이데거의 언어관과 아주 흡사하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서로를 탐독하지 않아도 '동일한 직관'의 자극을 받을 말을 하게 된다. 물론 수십년 정도 연구하여 늘 남의 주장을 동의어나 각종 수사학을 동원하여 적당히 포장하는 정도의 논문이나 저술물만 내놓던 이가 갑자기 '돌직구'에 가까운 둔탁한 철학자가 되어 아주 새로운 이론을 내놓는다면 의심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어느 정도의 진전을 이룬 이들을 더욱 경계해야만 할 것이다.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왜 자꾸 이렇게 많은 글을 자꾸 남기는 것일까? 논문이 되었든 저술물이 되었든 연구한 내용을 발표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왜 지난 1년 반동안 왜 이리 노마드처럼 이리저리 디지털 공간을 방랑하며 미완의 초록들만 남기냐는 것이다. 이상은 결코 이 나라의 자생적 지적 결집체들의 체계적인 프로그램에 의해 탄생한 천재가 아닐 것이다. 그냥 불쑥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다. 이상의 <실락원>은 정말 소름끼친다. 아래에 류재화님께서 깔끔하면서 묘한 울림을 전달하는 서평을 써주셨는데 아주 큰 도움을 받았다. 다만 마지막 문단의 진리와 관련된 어휘인 veritas는 이자나미의 히토미에서 슬금슬금 기어다니던 그 구더기들과 관련 깊을것이다. 플라톤의 기하학자들은 월경을 한다. 다이이나다. 월경을 하면 다 다이아나라는 말이 아니고 자벌레와 월경이라는 보리(voirie)의 분출이 동음이의어라는 뜻이다. 왜 독일의 드래곤은 따뜻해야 하나? 스페인어 사전도 '벌레 = 따뜻함'으로 이어진다. 일본의 벌레는 된장국이다. 이상의 <실락원>은 정말 소름 끼친다. 조지 오웰의 <1984>와 동일하게 배앓이를 한다. 조지 오웰의 표절일까? 그리고 내가 쓰는 이 무수한 글들이 지닌 아주 뜬금없는 글들 속에서 발견되는 주장들이 과연 다른 학자들의 논문에서 발견된 적이 있을까?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논문 따위를 거의 읽지 않아왔다. 인간적으로 다시 부탁한다. "우리는 원래 모르던 내용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웅베르토 나베) 여성 루프는 한 마리일까, 아니면 여러 마리일까? 아마 '뱅마리'(bain-marie)일 것이다. 이중 나베 구조다. 테트베쉬다. 짐승의 더러운 발냄새가 훅, 풍긴다. 다시 한 번 믿는다. 우선 피카르트의 생각을 잘 드러내 주는 본문 인용을 먼저 보고 류재화 님의 맛깔진 해설을 보도록 하겠다. <인간과 말>에 등장하는 막스 피가르트의 언어관이다. 해당 페이지는 한국어판(봄날의책.2013) 기준이다. "언어는 단지 필요와 목적에 맞게 조합해놓은 사물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살아온 선조가 보았던 모든 것, 즉 존재했던 모든 지나간 사물들 전체를 음성기호로 표기한, 세계에 대한 체계적이며 총체적 묘사" (F.마우트너)인 것이다. 만약 언어가 오직 필요에 의해서만 활용된다면, 언어는 닳아버리고 수축될 것이다. 언어는 침몰하게 될 것이고, 모든 침몰하는 것들을 자신 안에 담아버릴 것이다. 선험성으로 인해 언어는 단순한 용도, 단순한 전달수단 이상의 위치에 있다. 예를 들어, 단순한 전달수단에서 출발한 침묵은 뭔가가 결여된 것이며 비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선험성에서 출발한 침묵은 인간의 최초를 향해, 혹은 인간의 종말을 향해, 어떤 기대를 향해 뻗어나가게 된다." (p.20) "인공언어는 모든 공간을, 모든 시간을, 마치 압착기처럼 짜내서 폐기해버린다. 그것은 오직 순간만을 위한 언어다. 마치 순간만을 위해 일회적으로 임대한 것과 같다. 사람이 인공언어를 말한다. 하지만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기호를 뱉었을 뿐이다. 그의 세계에는 언어뿐 아니라 사물들까지도 축약되어 존재한다." (p.28) "선험성을 갖춘 언어에는 치유력이 있다. 그런 언어는 인간을 치유할 때, 인간이 스스로를 치유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언어 자체가 먼저 치유를 필요로 한다. 불멸은 유한하며 유한한 것은 불멸한다. 살아 있는 사람은 타인의 죽음을 살며, 죽는 사람은 타인의 삶을 죽는다. (헤라클레이토스, <<단장>>,62)" (p.30) "인류의 원죄 이후로 악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원죄 이후로 행해진 모든 악의 형상이 개별적인 악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의 개인적 악은 원죄로 인해 이후 인간에게 침투한 악과 사악한 경쟁을 벌인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악한 행위가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원죄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자신의 악을 창조해 내는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 어느 한 인간이 악하다면,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 있는 악의 일부분, 앞서 주어진 악이자 원죄의 일정 부분에 관여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이 악하다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그에게 어떤 악도 앞서 주어지지 않았고, 대신 그 스스로가 자신의 인성과 개성을 통해 악이란 개념을 최초로 도입이라도 한 것처럼 이해된다." (p.36) "소리를 정신에게 복종시키기, 아이는 아직 그것을 할 수 없고, 노인은 더 이상 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말 속에서 오직 소리에 속하는 것이 많이 들리게 된다. 정신과 소리는 작별을 시작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모든 것이 작별을 고한다. 소리와 정신의 작별은 궁극적 작별에 대한 선행 작별이다. 이윽고 정신이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날, 완전히 꺼져버리는 날, 기억상실형 실어증 증세에서처럼, 그때 이름은 오직 음향에 불과한 것이 된다." (p.59) "어린 아이의 언어는 전체성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기 이전의 언어다. 전체성 스스로가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아이의 말에는 하루의 그림이 침묵하고 있다. 그림은 침묵하면서 아이의 안에 있는 침묵하는 언어를 향해 이야기한다. 어른의 말에도 하루의 그림이 있다." (p.118) "오늘날의 말은 이제 내면 언어의 전체성과, 그리고 침묵과 거의 아무런 연관이 없는 상태다. 말은 자신의 전체성을 내면의 심연에 두고 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말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알 뿐이다. 말은 고립되었다. 언어의 전체성은 더 이상 말에 어떤 효력도 발휘하지 않는다." (p.121) " 우리의 크라튈로스는 주장한다. 모든 사물마다 그 사물의 속성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하나의 올바른 명칭이 존재한다고. 그런데도 몇몇 사람들끼리 합의를 통해 자기들이 가진 소리의 저장고에서 임의로 말조각을 꺼내 그 사물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제멋대로 정해버린 것이라고. 그런 식으로 결정된 것은 그 사물의 진짜 이름이 아니라고. 이름에는 자연에서 유래하는 공정함이 있고, 그 공정함은 어느 누구에게나 동일하다고." (플라톤, <크라튈로스>) '커다란 배 한 척이, 막 여기 운하에 도착하려 한다' (괴테) "수직성 자체는 오늘날까지도 인간 형상의 최우선 요소다. 그 수직성을 이루어낸 창조적인 움직임의 뒤를 이어서, 뼈와 근육, 피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 같다. 최초로 말이 침묵을 깨고 터져나올 때의 그 결정성과 인간 형상을 이루는 수직체의 결정성은 하나다." (p.190) [프레시안 books] 막스 피카르트의 <인간과 말> 막스 피카르트는 돌연 침묵하게 만든다. 무작정 돌진하던 내 혀가 검은 내 아가리로 들어간다. 말하고 싶은 안달이, 다 설명하고 싶은 강박이,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형상 기억 장치마냥 수그러든다. 막스 피카르트라는 이름을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간과 말>(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펴냄)이라는 너무나 자명한, 진부하기까지 한 제목 아래 무심히 등록되는 저자가 아니다. 그는 관조자, 어둠 속을 주시하는 한 마리 부엉이다. 피카르트의 글에서는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모태 속에서 들었을 법한 어머니의 고른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린다. '-다'로 연신 조용히 착륙하는 기이한 서술형 종결어미. 우리말의 '-다'가 이토록 내 두개골 아래서 잔잔히 울려 퍼진 적이 없다. 역자 배수아의 말처럼 번역이 "이종간의 사랑"이라면, 독일어와 우리말은 부드러운 안개처럼 잘 뒤섞였다. 사유 충만하면서도 행간마다 내적 공명 가득한 이 장편의 산문시는 다시 내 말로 잘 옮겨지지 않는다. 독서가 텅 빈 허공에 자기만의 정신의 계단을 만들어 오르고 내리며 아찔한 황홀경을 느끼는 일이라면, 그의 글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느리고 차분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분명 무언가를 불쑥, 통째로 보게 만든다. 온전히 옆도, 온전히 뒤도 볼 수 없었던 내 시각의 맹점(盲點)이 일거에 확대되는 느낌이 든다. "죽음은 인간에게 앞서 주어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과 함께 그에게 앞서 주어진 죽음을 죽는 것이다. 죽음이 미리 주어지지 않았다면, 죽음은 인간을 기습하는, 훨씬 더 격렬한 사건일 것이다."(36쪽) 사건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앞서 주어진 것이라는 피카르트의 일관된 상념은 종교적 운명론도 아니고, 형이상학적 관념론도 아니다. 우리의 생물적 감각은 이미 그것을 안다. 피카르트는 '아버지'란 "선행하는 창조력"이며 "선행하는 경고"라고 말한다. 어머니란 "선행하는 보호"다. "인간의 기본구조에 속하는 모든 요소는 앞서 주어진 것이다."(16쪽) 막스 피카르트가 이 책에서 줄곧 환기하는 '선험성'은 '내재적 초월'이 아니라 '내재적 하강'으로 번역될 필요가 있다. '이곳', '지금', 이 대기권 생물계의 우리는 애초부터 원초가 아니라 파생이었다. 탄생이 아니라 이동이다. 우리는 양각이며, 돌출이다. 모든 '현존'하는 것의 시작점을 '나', '지금', '여기'가 아닌, 그보다 앞선 지점, 혹은 더 아득히 앞선 지점으로 설정함으로써 피카르트는 시간과 공간의 영역을 왼쪽으로, 그러니까 이미 지나온 것 쪽으로 조금 앞당긴다. 그러고 나면, 우리가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얼굴, 우리의 자아, 우리의 실존, 우리의 감정, 우리의 의식 따위는 상대적으로 '튀어나온 것', 쓸데없이 '과잉'된 것이다. "얼굴은 우리의 종착역"이라는 피카르트의 말은 '얼굴'이 타자를 위한 현존으로서 내 실존의 당당한 시작이 아니라, 이미 끝나버린 실존, 이미 끝나버린 사랑 행위라는 말로 읽힌다. 그의 세계에서 보자면, 사르트르식 '실존주의'는 일종의 '오버'다. 우리는 좀 더 안으로, 뒤로 물러나야 한다. 내재적 하강으로, 내 내면의 우물을 깊이 파야 한다. 샘물은 저 깊은 심연에서 발생하지, 흘러넘친 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이미 주어진 것"이 실은 우리가 영영 잃어버린 것이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발생한 지점에서 우리는 너무 멀리 와 있다. 상류에서 한없이 멀어진 하류의 쓰레기 잔해물처럼 우리는 둥둥 떠다닌다. 숱한 대상을 만나도, 만남은 있으나 떨림이 없다. 토막 난 부도체마냥 자성(磁性) 잃은 나는, 아니 '나'라는 개체는 습성화된 몸짓으로 다른 개체와 붙는 척 할 뿐이다. 모든 것이 과잉인 시대에 사는 우리는 웬만한 것에는 전율하지 않는다. 언어의 과잉, 소리의 과잉, 이미지의 과잉, 빛의 과잉. 손바닥 안에 든, 21세기의 작은 괴물을 하루 종일 바라보며, 그것이 우리를 집어삼키는 줄은 새까맣게 모른 채, 의미조차 생성되지 않는 희한한 기표들을, 날파리 같은 하루살이 검색어들을, 소리만 무성한 잡음어들을 매일같이 집어삼키며 우리는 나날이 '없어지고' 있다. 끊임없이 외연만 연장하는 스토리에 포식되어 우리는 정작 내 내면의 스토리는 잃어버렸다. 과잉의 과잉 시대가 공포스러운 것은 나가도 너무 나간 나머지, 안으로 들어오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최초의 '과잉'은 가장 원초적이며, 가장 본래적이며, 가장 야생적이고 야한, 근원적인 생명점이었다. 창조적인 것은 포만의 정점에서 터진다. 말(末)은 나무 끝에서 막 솟아나온 또 하나의 작은 가지다. 끝이 곧 시작임을 알리는 이 짜릿한 연속성을 찰나에, 단 한 번에 알리는 상형 문자, 그 문자의 힘. 이것은 다른 언어에도 있다. 프랑스어로 '끝'(bout)은 눈, 싹, 꽃망울, 여드름, 단추를 뜻하는 'bouton'으로 이어진다. 과잉은 더는 못 참고 터지는 것, 최초의 순수 배설물이다. 우리는 이 최초의 과잉 지점에서 놀았어야 했다. 그곳에서만 황홀하게 자지러지기 때문이다. 땅속을 뚫고 나온 것이 싹만은 아니다. 인간의 혀, '랑그' (langue), 언어 또한 검은 입 속에서 삐져나온 잎이다. 인간은 말로써 존재하는 것 같지만, 대개는 말로써 자기 존재를 잃는다. 언어는 필수품이자 사치품, 잉여다. 파스칼 키냐르 식으로 말하면, "언어는 공기 중의 혐오스러운 파장"이며, "수상쩍은, 쓸데없는" "삶의 열정"이다. 말들이 얼굴을 만들지는 않으며, 말들 없이도 우리는 산다. 문제는 진짜 언어는 발설된 언어 이전에, 언어의 근원에 있는데, 이 근원은 얼굴이, 형체가 없다는 것이다. 실체는 있으나 형체는 없는 기이하고 신선한, 신비한 영액 같은 물속에서 언어가 탄생한다. 막스 피카르트의 <인간과 말>이 특히 빛을 발하며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은, 그가 '말'을 수가지 자연물(바람, 공기, 돌, 용암, 새, 벌레)로 활물화 하거나, 조형화된 온갖 형상으로 환유하면서다. 그의 메타포들은 범람한다. 자연계와 상상계를, 개념계를 전광석화처럼 이리저리 이동한다. 피카르트는 텅 빈 허공에, 어둡고 푸른 창공에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수많은 형상들을 조각한다. 말이 보인다. 침묵이 보인다. "순수하게 언어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은 침묵으로부터 튀어나와서, 불현듯 어느 한순간 거기 현존한다. 발생과 현존은 하나다."(49쪽) 피카르트는 언어 역시나 "이미 주어진 것"으로 본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선험적 언어는 "말과 사물이 낙원의 합일" 속에 머물렀던 때의 언어, 인간의 언어가 아닌 신의 언어, 인간이 잃어버린 언어다. 분리 이전의 세상, 인식의 나무인 선악과 이전의 세상, 실낙원 이전의 세상에서는 언어가 침묵을 내장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가 장막을 찢고 무대 위로 튀어나오니, 저 아래 아기 천사들이 심란한 표정을 짓는다. 라파엘로가 넌지시 암시한 것이 그것이다. 탄생이 곧 죽음이라는. 피카르트는 그리스도가 장막을 뚫고 나온 것처럼, 인간의 언어도 미세하고 신선한 얇은 장막을 뚫고 나왔다고 본다. 꽃봉오리는 터졌으므로 시들 일만 남았다. "언어는 말을 하면 할수록 스스로에게서 멀어지며"(86쪽) "오직 무작정 앞으로 나가는 것 이외의 다른 방향을 알지 못하는 언어는 폭력적이다."(30쪽). 피카르트는 침묵을 언어의 반대어가 아닌―이처럼 일차원적인, 저차원적인 상상력이 있을까?―, 언어의 동의어, 아니 언어라는 부분 집합을 포함하는 전체 집합으로 설정한다. 달리 말해, 침묵을 내포한 언어만이 진정한 언어다. 침묵을 내포하지 않은 언어는 잡음어에 불과하다. "공기 중의 파장"이라는 언어가 우리의 가슴 조각 하나 떨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들 언어가 심연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며, 내적인 연속성 없이 외적인 연속성만 계속해서 늘려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피카르트는 이미 <침묵의 세계>(최승자 옮김, 까치글방 펴냄)에서 언어와 침묵의 관계를 이렇게 뚜렷하게 형상화 한 바 있다. "죽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태고의 짐승처럼 침묵은 거기 누워 있다. 그 침묵의 넓은 등이 아직 보이기는 하지만, 그 태고의 짐승의 몸 전체가 오늘날의 전반적인 소음의 덤불 속에서 점점 더 깊이 가라앉고 있다. 그 태고의 짐승은 점차적으로 자신의 침묵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오늘날의 모든 소음은 다만 그 태고의 짐승, 즉 침묵의 드넓은 등에 붙은 벌레들의 울음소리에 불과한 것 같다." 계시록처럼 읽히는 이 아찔한 문장은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단번에 보여준다. 우리 안에 길게 드러누워 소리 없이 울부짖고 있는 태고의 짐승. 그것이 없거나, 있어도 어찌된 일인지 위로 끌어올리지 못한다. 모리스 블랑쇼가 라스코 동굴벽화에서 영감 받아 환기하고 있는 '거대한 침묵'도 이것이다. 또 파스칼 키냐르는 단말마의 메두사의 입 속으로, 그 자궁 같은 동굴 속으로 후진하는 언어를 상상한다. 키냐르는 벌어진 입 사이로 새어나온 말보다는 "혀끝에서 맴도는 말", 혹은 동굴의 내벽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겨우 역류하는 언어들만을 사랑한다. 그는 언어는 "반몽 상태에 억류되어 있는" "낮은 목소리의 중얼거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아노'(약하게)라는 말이 '피아노포르테'라는 말을 대체한 이유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왜 사랑을 잃는지 키냐르는 늘 상기한다. 우리가 "이미 주어진 것"으로, '과거'로, '태고'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이 발원점과 통하는 방법이 그나마 있다. 발원점에서 너무 멀리 온 우리 부도체가 애써 전도체가 되는 것이다. 자성이 흐르면 발원점과 종착점이라는 양극은 어떻게든 통한다. 부도체에 자성이 흐르게 하려면 뒤를, 지나온 것을 더욱 파야 하는데, 우리는 더욱 앞으로만 질주한다. 막스 피카르트는 우리는 이제 '과잉'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과잉의 행위'에 놀란다며 절망한다. "파괴된 말, 말기호 그리고 무제한의 기술은 서로 상응하는 성질이 있다. 단선적인 말기호는 곧장 단선적인 행위와 단선적인 기술로 이어진다."(176쪽) "과잉의 충만이 원인이 아니라, 무제한의 실험으로 놀라움을 양산해보려고 하는 빈곤함이 원인이다."(177쪽) 우리의 잡음어는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겠다는, 잡음어의 마지막까지 가보겠다는, 그래서 기필코 진짜 말이 다시 돌아오도록 만들겠다는 인간의 절망적 시도"(146쪽)다. 우리는 언어에 지치면 입을 다물 것이다. 그러나 이 '입 다뭄'은 생태적 침묵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발생시키지 못하는 침묵이다. 피카르트는 이제 우리 언어는 '구조'를 갖지 못한 채, '행위'만을 계속해서 유발한다고 폭로한다. 과잉 행위의 반복이란, 정신은 결여된 채, 광인의 행보처럼, 자기 안에 온전히 파고들기보다 자기 밖으로 계속해서, 계속해서 낳아가는 형국이다. 우리는 미친 듯 최대치를 열망하며 계속해서 앞으로만 나아간다. 이러한 진보는 충만이 아니라, 결핍 자체를 초래한다. '선험성'이 '먼저 있는 것', 그러나 상실한 것, 선행하였으나 이미 멀어진 것으로만 환기된다면, 우리는 그의 책 말미에 이르러 절망감에 빠졌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것을 기적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온전히 깃든 것으로서의 '전체성'이다. '선험성' 개념과 함께 피카르트의 두 번째 '복음어'가 그것이다. '선험성'이 직선적 상상력으로 파악된다면, '전체성'은 심연 바닥까지 둥글게 파서 다시 휘감으며 올리는 것으로, 천체의 궁륭처럼 연상된다. 과잉되고, 돌출되고, 양각되거나, 도망치고, 물러나고, 음각되고, 이 모든 상대적 뒤죽박죽들을, 언어의 다양성을, 진리의 다양성을 자비로운 풍족함으로 껴안는 전체성. 이것이 내적 발열성, "진실한 엔트로피"다. 진리는 향하지 않고, 깃든다. 우리가 아는 서양적 진리, '베리타스'(veritas)는 하이데거가 복원한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즉 "은폐되지 않은 것" "폭로되고 계시된 것"으로 복기되어 있다. 그런데 막스 피카르트는 '진실된'(verus)이란 어휘는 어원상 고대 북유럽어인 '바라르'(varar), 혹은 고대 고지 독일어인 '바라'(vara)에서 왔음을 명시한다. 이것은 밖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안에 온전히 깃들어 있는 '충실', '신의'다. 돌출되고 과잉된 언어 속에서도, 우리가 언어 때문에 전율하기 위해서는, 언어 안으로 온전히 깃들도록 극도로 애쓸 수밖에 없다. 곤궁한 나도, 허무한 나도 가만히 내 안에 침잠할 때 그나마 힘이 다시 솟아나는 것처럼. 류재화 번역가 (mal@press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