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을 보면 아주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미셸 푸코다. 그의 의도는 분명하다. '호모 사케르'를 미셸 푸코의 '생권력'에 상응하는 렉시콘으로 설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르지오 아감벤은 단 하나의 철학적 기제를 지닌 빈곤한 철학자에 불과하다. 무수한 언어학적 자료들은 끊이없이 영어의 swear처럼 '신성'과 '모독'을 동일 어휘소로 쓰고 있다. 여성의 출혈은 아주 정교하게 몸이 병들거나 폐경기를 지나지 않는 한 다이이나의 바이오 리듬의 지배를 받는다. 저주받을 다이아나의 하혈이 데페랑스를 하면 그 욕지기나는 핏물이 이 땅의 보잘 것 없는 호모 사케르들의 히멘 사이로 줄줄 흘러 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다이아나의 패드에 존재하는 모세 혈관이다.
플라톤은 '자벌레'(geometer)에게만 아카데미아 입학을 허락했다. 구더기(maggot)는 '맛'으로 이어진다. 특히 정열의 나라 스페인과 추운 철학의 영토인 독일에서 사용하는 국어 사전들은 부드러움, 맛, 그리고 구더기를 동일 어근으로 처리하고 있다.
태호복희가 들고 나타난 '자'(a ruler)를 보자. 거의 모든 서양 언어가 여인의 출혈, 즉 히멘이라는 결혼의 신의 파열에 이은 이 땅의 미세한 호모 사케르들에게 할당되는 '월경'과 태호복희가 들고 나온 '자'를 동일 어휘소(lexeme)로 처리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페리아고그'(periagogue)는 '회전형 카타르시스 분출 공간'에 불과하다. 'PERI'는 회전이요, 'AGOGUE'는 화장실이다. 아카데미아라는 말에 그리 가슴 뛰는 흥분을 느끼지 말지어다. '아카'는 스페인어로 분뇨에 불과하다. '데미'는 절반성이다. '아카'는 일본어로 아주 더러운 것을 말한다.
자, 우리는 어느 누구도 자유 의지에 따른 생리조차 못 하는 다이아나의 '검은 구멍'(trou noir)의 모세 혈관이다. 아카도 나온다. 그곳에서 잠시 후 구더기가 나온다. 중국의 창조 신화는 말한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반고'의 시체에서 구더기가 나오고 그 존재가 바로 사람이 된다. 일본의 신들도 프로이트와 칼 융의 발톱을 벗어나지 못 한다. 황천의 이자나미의 얼굴에는 구더기가 드글드글 하다. 황급히 놀란 이자나기는 도망을 치고야 만다.
마지막으로 조르지오 아감벤은 미셸 푸코의 '생권력', 즉 신을 살해하려 했다. 겉으로는 끝없이 '배제와 포획'의 양가성을 반복하면서 그들을 호모 사케르라 정의하면서 마음껏 죽여도 되는 존재, 즉 '치외법권' 지역에 놓인 희생자로만 정의한다. 역시 자크 데리다와 같은 균형감은 떨어진다. 내가 말하는 '사케르'는 일본어다. '찢어버리기'와 '피하기'라는 뜻을 동시에 전달하니 자크 데리다의 히멘을 닮았다. 일본어는 '히메'나 '히메루' 등에서도 처녀성과 차이와 반복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우리는 페르몬을 통해 백미터 밖에 있는 반란을 꿈꾸는 여전사들을 그대로 죽여 버리고야 마는 여왕 개미의 몸 안에 있는 체세포에 불과하다. 히멘옵테라, 페리아고그, 반고와 이자나미의 구더기, 데페랑스, 그리고 사케루!
지젝(Slavoj Žižek, 1949-, 옛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베니아)은『신체 없는 기관, 들뢰즈와 결과들』(김지훈 ‧ 박제철 ‧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06 / 원전 2004)에서 신체없는 기관을 상징적 남근으로 본다.
"남근은 내가 걸치고, 내 신체에 부착되지만 결코 내 신체의 ‘유기적 일부’가 되지 않는, 즉 비통합적인, 과잉적인 보충으로 영원히 튀어나와 있는 ‘신체 없는 기관’이다." (173쪽)
잘 했다. 실제가 아닌 상징, 역시 자크 라캉의 후예답다. 그 상징적 팔루스, 즉 여성 루프가 이쪽 '시체'(프랑스어와 일본어의 '카바네'가 형성하는 이항결합성을 보라. 프랑스어의 '카바네'는 하이데거의 존재의 집이다. 스위스 산장의 오두막이다. 천개의 고원인가? 일본어의 '카바네'는 정확하게 삶과 죽음을 동일 음소로 처리하고 있다. 일본어의 '아루'는 삶과 여행, 그리고 죽음을 글쓰기라는 의미소까지 함께 묶고 있는 언어 존재의 뫼비우스의 띠다. 이 끈은 다이아나의 배변과 하혈을 통해 이 죽음의 공간에 보리(voirie)를 뿌린다. 지젝의 '기관'은 질 들레즈를 거쳐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물을 이 매트릭스같은 불모의 땅에 흩뿌린 것일까?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 이탈리아)의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Homo Sacer, Il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 1995 / 국역본.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수정이 필요하다.
페스투스는 논집 『말의 의미에 대해』의 ‘성산’(聖山)이라는 항목에서 발전시킨 조르지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 대한 인식을 살펴 보자.
"호모 사케르란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를 말한다.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다." (155-6쪽)
"호모 사케르 역시 희생물로 바칠 수 없음의 형태로 신에게 바쳐지며 또한 죽여도 괜찮다는 형태로 공동체에 포함된다.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여도 되는 생명이 바로 신성한 생명이다." (174-5쪽)
노모스는 퓌지스, 즉 자연과 대비되는바 규범, 즉 법이다. 벌거벗은 존재들은 과연 누구일까? 왜 이브는 벌거벗음을 알고 치욕을 느낀 것일까? 이브를 인류의 반고로 설정하는 알레고리를 일부 수용해보자. 우리는 호모 사케르의 후손이다. 그 습하고 더러운 냄새나는 시궁창에서 쓰레기(voirie)가 이 불모의 땅으로 떨어진다.조르지오 아감벤도 살짝 이런 진실을 알고 있기는 했다. 퓌지스에서 노모스로 벌거벗겨진 채 하이데거의 피투성이의 이름으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진다.
"만일 오늘날에는 명백하게 규정된 하나의 호모 사케르의 형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232-2쪽)
《에로스에 관하여 - 언어의 기만과 히토미》
답글삭제발표자 이재웅 (2013.07.30)
[01] 소크라테스는 분명히 에로스를 죽음과 삶의 중간에 존재하는 히멘으로 보았다. 그에게 에로스는 길의 신 포로스와 결핍의 여신 페니아의 자식이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는 그 자체로는 선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악도 아니다. 에로스는 아름다움 자체를 상징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즉, 에로스가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자신에게 결핍된 부분을 채우기 위한 감정이므로 아름다움 그 자체일 수는 없다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요지일 것이다. 히멘의 양면성은 소크라테스가 인류 최초로 말한 셈이다. 소크라테스의 직관을 파르마콘에 대한 혐오감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그라마톨로지》로 승화시킨 자크 데리다도 역시 위대한 철학자임이 분명하다.
[02] éros는 érosion이 된다. 즉, 침식이다. 파고 드는 에칭과도 같다. 마치 동판화와 같다. 나의 상징적 욕동, 혹은 파루스가 에로스를 분출하면 너의 히멘은 침식된다. 이쪽 히토미에게는 음각이지만 저쪽 히토미는 양각이다. 시선의 양면성이다. 네거티브 필름과 포지티브 현상인 것이다.
[03] 비너스는 자신에게 발을 돌리고 프시케를 보러 가는 사람들이 싫다. 아들 큐피트, 즉 에로스를 시켜서 가장 추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도록 명령한다. 에로스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 한다. 그만 프시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자신에게 사랑의 화살을 쏜 것이다.
비너스는 최초의 여성 루프적 알레고리일까? 아무튼 큐피드를 끈으로 보면 될 것 같고 비너스와 프시케의 언니들의 질투는 혐극작용의 알레고리, 즉 백설 공주의 알레고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추남과 미남 구도는 영화 《미녀와 야수》일 가능성이 있다.
[4] 중요한 것은 '히토미' 알레고리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에로스는 왜 그 잘 생긴 얼굴을 숨기고 의심, 즉 하이데거의 '호기심'을 유발한 것일까? 추함을 숨기려는 보는 동작에 대한 금지와는 정반대다. 왜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춘 것일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프시케의 '히토미'는 자크 데리다의 양면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처녀막이 있던 자리로 에로스가 양각화를 그린다. 그러나 눈을 뜨면 안 된다. 아니, 아예 볼 수가 없게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사랑을 나눈다. 호기심을 자극한다. 언어성(= 추남이라는 어휘로 프시케의 연인은 알려짐)과 시각성(= 사실 눈을 뜨고 보면 미남인 에로스임)이 충돌한다. 니체가 말한 언어의 기만이다. 하이데거의 호기심과 더불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의 유희가 시작된다.
추한 몰골을 한 비너스는 거울을 통해 대칭적 색감을 드러낸 아름다운 프시케를 목격한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존재에게 사랑과 질투의 양면감정을 느낀다.
질투의 트랙에서 보자. 나의 추한 몰골을 상쇄하려면 프시케를 추남과 사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에로스를 보낸다. 그러나 에로스는 나의 분신이다. 그만 질투의 끝자락에 놓인 사랑의 감정이 솟구친다. 따라서 그녀를 사랑하도록, 즉 질투심을 억제하도록 자신에게 화살을 쏜다.
나는 다시 비너스의 뻬르소나(personna)로 돌아온다. 다시 프시케에 대한 질투심이 솟구친다. 다시 추남에게 강제로 결혼시킨다. 사실 미남인 자신의 분신인 에로스다. 그러나 이 사실을 숨겨야 한다. 자신에게 숨겨야 한다.
비너스는 자신의 욕망을 감추기 위해 프시케에게 남자는 아주 추남이라는 거짓말을 한다. 즉, 프시케가 미남을 물어 뜯어서 거세를 하는 꼴은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분신인 에로스는 은밀하게 욕망을 충족시킨다. 따라서 비너스는 프시케에게 고통을 주면서 자신의 분신을 통한 에로스의 분출이라는 쾌락을 획득한다. 가학과 피학이 뒤범벅이 된다. 그러나 알면 안 된다. 프시케는 그만 알고 말았다. 에로스는 화가 나서 나가 버린다. 너는 진실을 알면 안 된다. 아름다움과 추함 자체는 부차적인 플롯의 흐름에 불과하다.
안다는 것, 즉 플라톤의 에피스테메의 획득의 금지라는 인식론적 히멘이다. 눈을 열지 말라!
[05] 아들의 가면을 쓴 에로스의 액체가 거울이라는 히멘을 침식한다. 프시케는 침식당한다.
[06] 마지막으로 위에 등장한 소크라테스의 에로스관은 자신이 디오티마(Diotima)라는 무녀를 통해 들은 이야기를 전한 것이다. 디오티마는 에로스에 대해 설명하면서 소크라테스에게 여러 차례 질운을 던진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에서 끝없는 질문을 통해 상대방을 아포리아(aporia)의 상태에 빠뜨린 것과 동일한 상황이 전개된다. 디오티마의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여러 차례 "나는 잘 모르오"라는 대답을 한다. 그리고 결국 무녀 디오티마의 에로스에 대한 설명을 납득한다.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에로스에 대한 견해는 과연 누구의 것일까? 저자로 명기된 플라톤인가, 아니면 그녀의 말을 받아들인 소크라테스의 것인가, 그도 아니면 디오티마의 것인가?
그런데 무녀 디오티마는 또 누구에게 자크 데리다의 뇌리를 강타한 '히멘의 양면성'에 대한 설명을 들은 것일까? 그녀가 직접 에로스를 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분명히 무녀 디오티마가 말하는 에로스관은 상당히 특이하다. 사랑의 신으로만 여겼던 그를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인간과 절대로 죽을 수 없는 신의 중간자로 설명한다. T.S. Elito의 '보리'(Voirie)에 등장하는 절대로 죽지 못 하는 무녀 시빌레는 언제 에로스의 화살을 맞고 죽을 것인가?
무녀 디오티마의 에로스적 히멘이 필요하다. 시빌레(Sibylle)의 찢어진 히멘에서 새 살이 돋아 누빌레(Nubile)가 되는 순간 그녀는 등 뒤의 작은 소녀가 되어 하이데거의 빈말, 모호성, 그리고 호기심을 전제로 피투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볼 것이다. 우리의 늙고 볼품없는 여신 시빌레(Sibylle)는 거세(castration)에 대한 공포를 딛고 인간이 되기를 희망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이 죽음의 공간에 내던져진(cast) 후 다시 인간이 되면 그녀는 소원대로 죽을 수 있을 것이다. 후빌라시옹(jubilación), 즉 이쪽 세상으로의 은퇴는 바로 환희로 이어질 것이다.
자, 영원히 죽지 못 하는 신인 시빌레(Sibylle), 죽음을 각오하고 신들의 영원에 비하면 먼지만큼이 인간의 삶을 부여받은 언젠가는 붉은 피를 흘리며 사라지고야 말 덧없는 누빌레(nunile), 그리고 죽음과 삶의 이중주곡인 후빌라시옹(jubilación)! 시빌레는 누빌레로 이어진다. 그 순간 후빌라시옹(jubilación)을 외친다. 그러나 거세의 공포를 이겨내야만 한다.
"님재는 칼잽입네까?"
T가 조용히 칼을 내민다.
(귤이나 까세요...)
그렇게 거센 언어의 도상을 거쳐 캐스트레이션의 공포를 이겨낸 프시케는 나비가 된다. 이를 가리켜 나는 나빌레(nabille)라 하겠다. 이 보리(voirie)같은 나라의 언어에 대한 나의 최소한의 예우다.
"샨티, 샨티, 샨티!" (입 닥쳐...)
파르라니 깎은 머리 고이 접어 나빌레라...
답글삭제플라톤의『향연』의 등장 인물들은 동성애로 묶여 있다. 아가톤과 파우사니아스가 첫번째 그룹이다. 그런데 파우사니아스는 비너스에 대해 남성성을 명확하게 언급한다. 물론 그 당시는 고대 그리스이므로 아프로디테라는 이름으로 불리었겠지만 윗글에서 기술한 "비너스-에로스-프시케" 알레고르를 존중하여 우선 비너스라 하겠다. 이하의 주장에서 '하늘의 여신'은 바로 비너스(= 아프로디테)다.
“신적 사랑은 하늘의 여신으로부터 유출도출된다.그녀 안에는 여성성이 없다. 오로지 남성성만 존재한다. 그리하여 이 사랑은 소년에게로 향한다."
'소년'에 대한 기술은 조금 뒤에 하도록 한다. 우선 아가톤의 남자 친구인 파우사니아스의 그 다음 말을 더 들어보자. 참고로 고대 그리스는 여성은 참정권이 없는 열등한 존재였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처럼 이미 당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확보한 철학자가 참석한 자리에 여자가 있을 수는 없다. 파우사니아스의 애인인 아가톤 역시 남자라는 점을 다시 상기하자.
"이 여신은 노년에 달한다. 따라서 폭력을 피한다. 이 사랑에 감동한 사람들은 남성적인 것을 사모하고, 자연스럽게 더욱 생동적이고 지적인 것에 애착을 느낀다.”
비너스의 공간을 늙은 무녀, 시빌레로 배치하자. 그리고 에로스, 즉 자신의 리비도에 의해 분출되는 팔루스를 소년이라 하자. "남성적인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바로 호모 사케르, 즉 '갈라진 미시 권력체'다. 여성성이다. 즉 파우사니아스의 말을 조금 더 체계적으로 도식화하면 '비너스-에로스-프시케'의 알레고리가 완성된다. 그는 무엇에 이끌려 비너스를 남성성을 지닌 존재라고 한 것일까?
비너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나머지 사랑의 넥타르를 분출한다. 그러나 프시케의 히멘 속으로 진입하는 순간, 물줄기가 잘려나가듯 상징적 거세에 의해 팔루스가 피투성이가 된다. 물론 에로스화한 비너스의 물줄기의 침범을 받은 프시케의 히멘 역시 피로 물든다. 온통 피투성이다.
"갑자기,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술꾼들이 몰려 들었나 보다."
향연의 호스트인 아가톤은 잔치의 폐막, 즉 이제는 짐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고 선언한다. 아마 술의 흥취에 젖었으니 애인인 파우사니아스의 품에 안기지 않을까? 플라톤은 어쩌면 셰익스피어를 능가하는 위대한 극작가로 후대에 판별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독자들에게 신의 사랑을 빙자하여 흥취를 돋군 후 두 동성애자의 분위기로 플롯을 이어 나간다. 의도적 배치인 듯 하다.
갑자기 알키비아데스가 술에 취해 진입한다. 그리스 최고의 꽃미남, 알키비아데스는 큰 환영을 받는다. 극이 끝날 듯한 상황에 갑자기 '임팩트'를 준 것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극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내용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는 소크라테스의 비밀을 폭로하겠다고 협박을 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애인이지만 아직 자신의 육체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유혹에 소극적인 저항만 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데스의 망토 위에서 잠을 청한다. 소크라테스는 최고의 작가는 비극만이 아니라 희극도 잘 써야 한다고 읊조린다.
"그들이 잠자리로 떠난 후, 소크라테스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리스토데무스는 늘 그러하듯 그를 따랐다. 소크라테스는 리세움으로 가서 목욕을 하고, 다른 날들처럼 나머지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잠자러 갔다.”
소크라테스 최고의 사랑은 바로 플라톤이었다!
(임을 윤에게 보내고, 아!)(귤이나 까세요!)(샨티, 샨티, 샨티, 입.닥.쳐.!) 끝.